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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월 30일 소식

by 똑똑한 예티 2025. 3. 30.
존 웨슬리 "잭" 쿰스(영어: John Wesley "Jack" Coombs, 1882년 11월 18일 ~ 1957년 4월 15일)는 "콜비 잭"(영어: Colby Jack)이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미국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감독이다. 1900년대와 1910년대에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MLB)에서 투수로 활약했으며, 우투양타였다. 14시즌 동안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 브루클린 로빈스,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에서 뛰었다. 통산 354경기에 출전해 2,320이닝을 던지며 158승 110패, 187완투, 35완봉, 2.78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메인주 케네벙크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고, 콜비 칼리지 시절 야구에 두각을 나타냈다. 1905년 말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에 입단, 다음해부터 애슬레틱스 선발진의 한 축으로 자리잡아 활약하기 시작했다. 1910년과 1911년에는 아메리칸 리그(AL) 다승왕을 차지하는 동시에 팀의 월드 시리즈 우승을 이끌면서, 애슬레틱스 투수진의 실질적인 에이스 역할을 했다. 1912년 이후 장티푸스로 인해 공을 제대로 던지지 못하면서, 브루클린 로빈스로 이적해 1915년부터 4년간 그곳에서 공을 던졌다. 선수 시절 빠른 속구와 낙차 큰 커브를 주무기로 타자들을 상대했다. 이후 은퇴를 선택했고, 1919년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감독을 맡았다. 그러나 곧 사임하고 다음해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에서 코치를 맡았으며, 잠시 이 때 현역으로 복귀하기도 했다. 1929년부터 1952년까지 듀크 대학교 야구팀 블루 데빌의 감독을 맡아 팀을 이끌었다. 여생을 텍사스주 팔레스타인에서 보냈으며, 1957년 사망했다. 어린 시절 존 웨슬리 쿰스는 1882년 11월 18일 미국 아이오와주 시골 르그랜드에서 프랭크 H. 쿰스와 엘렌 J. 스노우 쿰스의 다섯 자녀 중 첫째로 태어났다.[1] 쿰스 부부는 메인주 출신으로 2년 전에 결혼해 그곳에서 살다가, 1881년 아이오와 주로 이주해 홈스테드 법으로 농지를 얻어 살았다. 아버지 프랭크 쿰스는 대장장이로 일했으며, 어머니 넬리 스노우는 아들 존 쿰스와 커티스, 어니스트, 딸 앨리스를 키워냈다.[2] 존 쿰스가 4살이 되던 해, 그와 그의 가족들은 메인주 남쪽의 케네벙크로 이주했다.[1] 그곳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쿰스는 1898년 프리포트 고등학교에 입학했는데, 우등생으로 뽑혀 학교에서 대학 과정을 선행하는 한편 여름에는 지역 세미프로 야구 리그에서 투수로 뛰었고 미식축구에도 재능을 보였다. 그를 눈여겨 본 콜비 칼리지 출신의 J. F. 힐 박사의 추천으로, 쿰스는 고등학교 마지막 해에 콜비 칼리지의 예비 학교이자 메인주 워터빌에 있는 콜번 클래시컬 인스티튜트로 전학했고, 1902년 봄에 졸업했다.[2] 1902년 가을에 콜빈 컬리지에 입학했고, 화학을 전공했다. 학교에서 야구, 농구, 미식축구, 육상 등에 두각을 나타냈는데 특히 야구, 농구 학교 대표팀에서는 주장을 맡았고, 메인주 내의 대학 간 야구 대회에서는 모든 포지션을 뛰었다.[1] 여름에는 지역 세미프로 야구팀에서 뛰며 학비를 충당했다.[2] 프로 경력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 1906~1909 쿰스 자신은 대학 졸업 후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에서 학업을 이어갈 계획이었으나, 평소 그의 실력을 익히 알고 있었던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 감독 코니 맥의 동생 톰 맥이 팀에 그를 추천했다. 결국 1905년 12월에 애슬레틱스와 시즌 2,400 달러의 금액으로 계약했다.[1][3] 대학을 졸업한 후 1906년 7월 2일, 잭 쿰스는 애슬레틱스 선수단에 처음으로 합류해 연습 투구를 선보였다.[4] 사흘 뒤인 7월 5일, 잭 쿰스는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와 워싱턴 세너터스의 경기에 메이저 리그 데뷔 선발 등판해 7피안타 5볼넷 6탈삼진 완봉승을 기록했고, 팀은 3-0으로 승리했다.[5] 이후 7월과 8월 그저그런 활약으로 5승 7패만을 기록했으나, 9월 1일 보스턴 아메리칸스와 더블헤더로 예정되었던 경기 중 첫 시합에서는 조 해리스의 상대로 선발 등판해 24이닝 15피안타 18탈삼진 완투승을 거두었다.[1] 이번 시즌 23경기(선발 18경기)에서 173이닝을 던지며 10승 10패, 2.50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6] "그는 전혀 투수같지 않았다. 그냥 순박한 시골 사람 티가 났다. 그에게 이곳은 새로운 세계였을 것이다." – 팀 동료 해리 데이비스가 잭 쿰스의 첫 인상에 대해서 이야기한 말.[4] 성공적인 신인 시즌 활약으로, 잭 쿰스는 루브 워델, 에디 플랭크, 치프 벤더에 이은 팀의 네 번째 선발로 자리잡았다. 아직 덜 풀린 날씨에서 열린 1907년 시즌 개막전에서 코니 맥 감독은 보스턴의 사이 영을 상대로 쿰스를 선발로 내세웠다. 쿰스는 8이닝까지 1실점했으나 9회 팀의 실책 등으로 3점을 내주었고, 이후 경기는 13회까지 동점으로 이어지다가 14회에 쿰스가 4실점하면서 보스턴이 승리를 가져갔다.[7] 이후 6월 27일부터 팔 부상으로 경기에 나서지 못하다가, 시즌 후반 팔이 완전히 낫지 않은 상태에서 팀에 복귀해 힘을 보탰다.[8] 2년차 시즌에는 3.12의 평균자책점과 6승 9패의 기록으로 패가 승보다 많은 시즌을 보냈다.[1][6]